본문 바로가기
Day by Day

'미혼모'라는 단어의 기호학

by Iamhere 2009. 11. 13.


 '기호'는 흔히 도상, 지표, 상징 세 가지로 분류된다. 도상은 실제 사물이나 인물의 모습을 본 따서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어진 기호로 도로표지판의 낙석 주의 표시나 화장실 앞의 남녀 표시를 예로 들 수 있다. 지표는 다른 두 개의 현상 또는 개념을 결시켜주고 그 관계를 가리키는 기호이다. 예를 들어, 연기가 나는 것은 어디선가 불이 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마지막으로 상징이란 기호에 선천적이거나 자연스러운 의미가 아닌 자의적인 의미가 붙은 경우의 기호를 말한다. 쉬운 예로,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를 들 수 있겠다.

 얼마 전에 임신 중절을 반대하는 산부인과 의사들의 토론을 기사화한 조선일보의 글을 읽다가 복잡미묘한 심정이 들었다. 임신 중절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사회적 세태 및 생명 경시 풍조에 대한 그들의 경고는 어느 정도 공감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사의 반 쯤 가서 거슬리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미혼모'

 이 단어가 왜 이렇게 불편하게 들릴까 생각하던 중에 머리로 뭔가 맞은 것처럼 그 이유가 선명하게 다가왔다. 흔히 혼전 성경험으로 임신한 또는 아기를 출산하는 여성을 '미혼모'라 부른다. 헌데, 임신과 출산 혹은 낙태의 과정 속에서 남자는 없는 걸까? 아니다. 분명, 임신은 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미혼 '母'라는 이 말은 마치 임신이 여성 혼자 이루어진 듯, 그 책임은 여성 혼자에게 있다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끔 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단어를 기호학적으로 살펴보면 여성을 향한 부정적인 태도를 부추기는 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미혼모'라는 단어에는 당연히 아이를 밴 엄마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임신'이라는 뜻을 자연스럽게 내포하고 있다. '임신'은 성경험의 지표이다. 임신은 그 전의 성경험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험'은 온갖 의미들을 내포하는 '상징'의 하나이다. 특히나 '여성'의 성경험은 많은 것들을 상징한다. 부정함, 헤픔, 더러움, 조신하지 않음 등 부정적인 것들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여성의 성 경험이다. 이는 남성의 성경험이 상징하는 바와는 현격히 다르다. 남성은 오히려 성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능력 있는 것으로 추앙 받지만 여성은 퇴폐적이고 문란하다는 이중 잣대가 적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따라서 '미혼모'라는 단어는 두 가지 기능으로서 우리의 사회적인 그러나 왜곡된 인식을 더욱 편재하게 만든다. 첫째, '미혼모'라는 말에 '남자'의 존재는 없다. 이를 통해 혼전 임신의 존재와 책임을 오로지 여성에게만 부과하는 암묵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둘째, '미혼모'라는 말은 임신과 섹스의 지표이며 이는 여성의 성경험과 관련된 부정적이고 편향된 상징적 의미들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미혼모'라는 말 대신에 '미혼부모' 혹은 '미혼남녀'라는 말을 쓰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본다. '부'라는 한자 하나의 삽입으로 '미혼모'라는 단어의 왜곡된 기호학적 기능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보니 이 기사는 미혼모라는 단어 외에도 줄곧 '여성'이라는 단어만을 사용하면서 임신과 낙태의 사안 중심에 여성만을 홀로 세워두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사법고시에 합격한 여성도 하고, 검사 부인도 한다. 낙태 못 해준다고 하면 "진료 거부 하느냐"며 따지는 여성도 있다." 이러한 어느 산부인과의 말에서는 여성을 비난하는 어조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사법고시 합격한 여성, 검사 부인 같은 전문직 혹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여성을 예로 들었을까? 이것은 마치 가끔 드라마에서 일하는 전문직 커리어 우먼을 악역으로, 일을 하지 않는 주부를 착한 역으로 설정하는 풍습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Cheris Kramarae는 그의 이론인 Muted Group Theory는 남성이 만든 언어(man-made language)가 어떻게 여성을 정의시키고 제외 시키고 과소평가 되게 하는지에 대한 논의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70년대에 만들어진 sexual harrassment이라는 단어를 들 수 있다. 이 단어가 생겨나기 전에는 직장이나 학교에서 일어나는 남성들의 부적절한 행위는 그저 'being friendly'(친절하게 대하는 것)  혹은 'making advances'(작업거는 것)로 정의되곤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70년대 이전의 여성들은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억압 받고 혼란스러워 했을 것이다. '미혼모'라는 단어도 비슷한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미디어에서나 실제 생활에서나 '미혼부모'라는 말을 쓰게 되면 어떨지 상상해본다.
  

'Day by D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World is just Awesome_Discovery Channel  (1) 2010.04.21
In Store for 2010  (0) 2009.12.26
Vanitas vanitatum omnia vanitas  (0) 2009.08.19
On My Mind  (2) 2009.07.18
그냥  (2) 2009.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