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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 Listen Do Think/Films

500일의 썸머

by Iamhere 2010. 2. 11.

500일의 썸머
감독 마크 웹 (2009 / 미국)
출연 조셉 고든 레빗, 조이 데이셔넬, 패트리샤 벨처, 레이첼 보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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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is not a love story." 이 영화의 내레이션이 얘기해주듯, 톰과 썸머의 사랑에 대한 이 영화는 두 선남선녀가 온갖 갈등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랑에 골인하는 흔하디 흔한 로맨틱 코메디가 아니다. 오히려 톰과 썸머의 이야기는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처럼 사랑에 대한 메타텍스트가 된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신비로운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랑의 허황된 모습을 까발린다. 영화의 막바지에 흐르는 내레이션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즉, 세상에는 사랑이 아닌 우연밖에 없을 뿐이고 그러한 상황에서 용기를 내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운명적인 사랑을 믿지 않는 썸머가 톰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고서 "What if I'd gone to the movies? What if I'd gone somewhere else for lunch?"라고 얘기하는 것을 통해 사랑의 신비한 면모 역시 부각시키고 있다. 결국 사랑은 콩깍지와 우연, 숙명과 운명이 뒤섞인 모순덩어리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테마는 감각적인 영상과 느낌있는 음악으로 우리에게 더욱 호소력 있게 다가온다. 시간의 순서를 섞고 애니메이션으로 캐릭터의 감정을 묘사해주고 기대(expectation)와 현실(reality)을 분할화면으로 보여주는 실험적인 영상 기법들은 화면에 즐거운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미셸 공드리스럽지만 조금은 절제된 발랄함이랄까.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는 곡들도 너무나 적절해서 OST를 사려고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자막 번역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다. 톰의 친구가 진도 어디까지 나갔냐고 물으면서 *19금!* blow job, hand job? 이런 식으로 묻다가 썸머가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수습하려고 if any jobs come up let me know~라면서 무마하려하는데 자막이 이런 재치를 캐치해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런 대사를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지 아빠랑 얘기하다가 아빠가 꽤 유머러스한 한국말 표현을 제안했는데 좀 19금스러워서 차마 쓰지는 못하겠다ㅎㅎ(아빠는 은퇴하면 이런 영화 자막 번역일을 하고 싶다고 그랬는데 정말 잘 할 듯!ㅋㅋ). 그리고 썸머가 I was reading Dorian Grey(오스카 와일드의 장편 소설)~이라고 얘기하는 부분도 그냥 "책 읽고 있었는데~" 하고 넘어갈 뿐이다. 책 제목까지 나왔다면 썸머라는 캐릭터에 대한 느낌을 쌓아올리는데 좀 더 도움이 됐을지도. 
 
 이 영화는 본의 아니게 우리의 500일 기념일에 봤다. 영화 자체도 재밌었지만 새삼 내 자신과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그 날 학교에서 잠수종과 나비를 보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 지하철 칸에 타지 않았더라면?' 같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용감하게 우연을 운명으로 바꾼 옆 사람에게 고맙다 : )